특집

[26-10] 오백전 얼마나 알고 있니?

매년 10월이면 증심사의 상징인 오백전에서 불보살님과 십대제자, 그리고 오백나한을 모시고 부단한 정진을 약속하는‘증심사 오백나한 대재’가 봉행된다. 올해도 10월 12일부터 11월 1일까지 약 3주간 진행되는 오백대재를 맞아, 우리 절 오백전에 봉안되어 있는 나한님들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알아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김태형 송광사 성보박물관 학예실장의 정리로 오백전과 오백나한의 역사를 알아보는 한편, 오백전 건립 설화로 전해내려오는 ‘배고픈 다리’ 이야기를 AI 일러스트로 재현한다. <편집자주>

증심사는 860년에 철감선사 도윤(798~868)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이후의 연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고려시대인 1094년(선종 11)에 혜조국사(?~?, 화순 쌍봉사 중창주)가 중창했다고 전한다.

1443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전라도 관찰사 김방이 증심사를 중창하였는데, 이때 오백나한전을 건립했다고 한다. 이후 정유재란(1597)에 소실되었으나, 1609년 석경 · 수장 · 도광 스님 등이 재건하였다. 그 후에도 중수를 거듭하며 명맥을 이어 왔으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는 참화를 막지 못했다. 다만 오백전 등 몇몇 건물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현재 증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오백전(오백나한전)’이다. 한국전쟁의 포화속에서도 피해를 입지 않아 건물자체가 전남광주특별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지만, 그 안에 봉안된 불상과 나한상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단순히 사적을 들여다보면 1443년 불상과 나한상이 조성되었다가 1597년 전쟁통에 큰 피해를 입고, 1609년 즈음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오백전 불상과 나한상들에 대한 상세한 조사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매우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2005년 국가유산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바, 오백전 불상과 나한상의 규모는 석가여래 본존상 1구, 십대 제자상 10구, 16나한상 16구, 사자(使者)상 2구, 인왕상 2구, 오백나한상 469구 등 모두 500구로 확인된다.[i]

각 불상의 크기는 본존불 높이 125㎝에 무릎 폭 90㎝, 아난과 가섭존자 높이 127㎝, 10대 제자와 16나한 높이 약 100㎝내외, 오백나한 높이 약 40㎝ 내외, 사자와 인왕상 높이 약 150㎝ 내외이다.

각 불상을 조성한 재료는 다음과 같다. 본존인 석가여래는 나무로 만들었고, 10대 제자와 16나한, 사자, 인왕상 등은 나무와 흙으로, 500나한은 흙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아난과 가섭을 포함한 16나한과 10대 제자는 목심(木心)을 세우고 그 위에 흙으로 외형을 만든 다음 양손은 나무를 조각하여 부착했다. 본존 곁에 서있는 아난과 가섭을제외한 나머지 존자와 나한은 기암괴석을 나무로 조각한 암좌(岩座)에 위에 좌정해 있다.

불단 전면에 배치된 본존불과 나한상 뒤로는 469구의 나한 좌상이 있는데 나무로 만든 받침대 위에 1구씩 조성돼 법당뒷면을 가득 채웠고 심지어 대들보 위에도 올려져 있다.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한 오백나한은 대부분 ‘민머리’지만일부는 두건과 모자를 쓴 경우도 보인다. 또한 연잎이나 럭비선수들이 머리에 착용하는 헬멧과 같은 모자를 쓴 형태도볼 수 있다.

언제 만들어졌을까?

이들 불상의 제작연대에 대해서는 대부분 조선 후기로 언급되고 있지만, 본존불의 연화대좌와 같이 연꽃잎을 하나씩붙여 만든 형태는 17세기 중반 이전 조성을 추정케 한다. 

이와 같은 형태의 연화좌대는 구례 천은사 아미타 삼존불 대좌(1614), 순천 송광사 응진전 본존불 대좌(1624), 고흥 능가사 대웅전 본존불 대좌(1639), 해남 미황사 대웅전 삼불상 대좌(1640년대) 등의 사례와 유사하다. 따라서 오백전 본존불의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있으며, 이와 함께 10대 제자와 16나한, 오백나한도 17세기 중반 이전에 조성되었을 것으로추정해 본다.

증심사 오백전만의 특색, 10대 제자상 배치

오백전 안의 불상 배치는 불단 아래 좌우에 사자와 인왕상, 불단 위 중앙에 석가여래, 석가여래 좌우에 아난과 가섭존자가 있다. 그리고 합장을 한 십대 제자가 각각 5위씩 도열하고 있으며, 그 옆으로 16나한이 8위씩 좌우에 봉안돼 있다.

오백전 불상 배치에 있어서 가장 특이한 점은 다른 사찰의 응진당 등에서는 볼 수 없는 10대 제자상의 배치다. 조선후기 조성된 전남지역 응진당과 나한전 등에 봉안된 나한상 중에서 증심사처럼 도상을 명확히 구분하여 십대제자 모두와 16나한을 한꺼번에 빠짐없이 봉안한 사례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타 사찰의 경우 가섭과 아난존자를 포함하여 18구를 봉안한 경우와 가섭과 아난을 제외하거나 포함하여 16구를 봉안한사례가 있지만, 열 명의 제자를 따로 조성한 경우는 극히 드문 것이다. 

또한 다른 사찰에서는 좌우보처로 제화갈라와 미륵보살과 범천과 제석천을 두는 경우가 있지만 증심사 오백전에서는보이지 않는다. 좌우보처의 경우 전쟁과 같은 혼란 속에서 유실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향후 오백전 불상들에 대한 정밀 조사가 실시된다면 조성시기와 제작자 등이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i] 일제강점기 작성된 증심사 재산대장에는 소조 나한상의 수량이 500구로 되어 있다. 2005년 조사 때와는 31구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 원인은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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