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1] 참선곡 5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깐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
옛날 조사스님이나 수행자들은 1분1초도 아껴서 참선을 했는데 나는 어째서 방일한가, 자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경허스님은 조선시대 말의 탁월한 학승이었다. 강백이라고도 말한다. 젊은 나이에도 경을 아주 잘 보니 강의를 하면 중국 스님들도 몰려들어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어느 순간 경전 공부의 한계를 느끼고 참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여 가부좌를 틀고 참선을 하는데, 앉기만 하면 조는 것이다. 그러자 칼을 턱밑에 두고 조금이라도 졸면 칼에 찔리도록 아주 독한 마음으로 공부를 했다고 전한다.
한편 예전 사람들은 하루 해가 넘어갈 때 다리를 뻗고 울었다고 한다. 왜일까? 내가 오늘도 깨치지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는 통탄이다. 그 정도로 마음을 내어서 옛 분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다.
무명업식(無明業識) 독한 술에 혼혼불각(昏昏不覺) 지내다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 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한 이 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
쓸데없는 탐심진심(貪心瞋心)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許多分別) 날마다 분요(紛擾)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할꼬
지각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
중생들은 무명의 취하여 크게 착각하며 살고 있다. 무명에 빠진 마음가짐에서 나오는 행동, 그로인한 모든 번뇌가 바로 업식이다. 이 무명업식은 마치 독한 술과도 같다. 우리는 정신이 멀쩡하다 생각하는데 깨친 이가 보기에는 모두 다 취해서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니 타일러도 들을 생각이 없고, 꾸짖어도 조심하지 않는다.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온 자식을 아무리 꾸짖어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는 알아듣지 못한다. 이렇게 아무 소용도 없으니 혼미한 이 중생들을 어떻게 인도해야 할 것인지를 한탄한다.
술에 취하면 구석에서 조용히 자는 사람도 있지만 주사가 심한 사람도 있다. 옆에 사람과 시비하거나 힘들다고 하소연을 한다.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탐심과 진심을 공연히 일으키는 모습이다. 또한 허다하게 많은 분별심을 낸다. 분별심은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마음, 나와 남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한편 밤이 되면 나방들이 가로등에 마구 몰려든다. 촛불을 켜놓아도 마찬가지다. 촛불에 타죽는지도 모르고 그저 불이 좋다고 몰려온다. 우리는 불나방을 보고는 참 한심한 삶을 산다며 혀를 차지만, 깨달은 분이 보기에는 우리들의 삶이 불나방과 다를 것이 없다. 불빛을 탐하는 것은 욕심이요, 무명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인생이 풍전등화인데도 어떻게 공부할 마음을 내겠느냐고 반문하는 경책이다.
내 마음을 못 닦으면 여간계행(如干戒行) 소분복덕(小分福德)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히 보아
하루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위에 펴놓고 시시때때 경책(驚策)하소
할 말을 다 하려면 해묵서이(海墨書而) 부진(不盡)이라
이만 적고 그치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한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기 낳으면 그때에 말할테요
마음을 닦지 않으면 조금이나마 지킨 계행들과 아주 조금의 복덕 역시도 모두가 허사가 되니, 경허스님은 노파심에 이러한 당부를 한다. 당신이 중생들을 위해서 노래를 짓노니 하루 24시간,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라고 말이다. 이 노래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언제나 들여다보며 시시때때로 공부하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다시금 당부한다.
경허스님이 중생들을 위해서 할 말이 얼마나 많느냐 하면 바닷물을 모조리 먹 가는 데에 써서 글을 써도 모자라다고 한다. 할 말이 그렇게 많지만 이쯤해서 그만 적고, 돌장승이 아기를 낳으면 그때에 다시 말하겠다고 한다. 여기에서 경허스님의 선사로서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여태껏 참선곡을 배우면서 경허스님 말이 백번천번 옳다고 하며 반성하고 수행할 마음을 내고 있는데, 돌장승이 아이를 낳으면 그때에 다시 말한다고 하니 생각이 탁 막히게 된다. “돌장승이 어떻게 아이를 낳지?”, “돌장승이 아이를 낳는 때가 언제지?” 화두는 이렇게 드는 것이다. 하늘같이 존경하는 스승님이 아리송한 말을 할 때 ‘어째서일까’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에 생각에 생각을 하다 보니 깨치게 되더라는 것이다.
화두를 들기 위해서는 첫 번째는 화두를 주는 스승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이 있어야 한다. 무자 화두를 받았다면 “개가 불성이 왜 없을까?” 치열하게 탐구해야 한다.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하네!” 하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 절대적인, 내 목숨을 버릴 만큼의 존경이 있어야 스승이 내리는 공안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수 있다. 턱 막혔던 생각이 터지는 순간 깨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참선수행을 해야 할까? 수행을 열심히 하면 좋긴 좋지만, 되지도 않는 것 왜 하느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살며 부처님 말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게 살면서 우리 가족 무탈하고 행복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많은 불자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온 결과가 무엇인가? 양심적인 시민으로서 그저 내 직업에 충실했을 뿐인데, 직업에 충실하다보니 환경이 파괴되고 기후위기가 오고 각종 감염병으로 꼼짝달싹 못 하게 되었다. 개인은 충실히 살아왔을 뿐인데 인류는 위기에 놓여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혼자 잘 살아야 할까, 궁극적이고 영원한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 99명이 불행하고 나 혼자만 행복하다면 결코 그 행복은 오래 갈 수 없다. 우리 가족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모든 사람이 행복해야 한다. 이 사실을 명심하기 위해서는 가장 근본적으로 ‘무명을 깨치라’는 부처님 말씀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무명에 취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참선곡> 공부를 마치며 경허스님이 이 시대의 큰스님으로 살고 계신다면 우리들에게 어떤 법문을 하셨을까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