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1] 동체대비, 봉사에 대하여

오늘은 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불교의 여러 미덕 가운데 지혜와 자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평소 “자비의 현대적표현이 봉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요. 자비가 봉사와 연결되는 지점을 설명해주신다면요?
- 불교에서는 자비심의 핵심으로 ‘동체대비’라는 말을 씁니다. 우리는 다 한 몸이라는 생각에서 큰 자비심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 ‘네가 불쌍하니까 내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동정심이지 자비심이 아닙니다.
비유를 들어 내 신체 중에서 발가락이 아프다고 합시다. 그때는 발가락에 약을 발라주거나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내신체가 아플 때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처럼 남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내 일처럼 행위하는 것이 동체대비, 자비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비를 현대적 의미로 표현할 때 가장 가까운 말이 봉사이고 말입니다.
이웃사람, 주변인에게 내 일인 것처럼 행하는 것이 자비와 봉사라고 한다면, 나의 역량에 맞는 봉사를 실제 행동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주머니 사정이 좀 넉넉하다고 하면 재물을 통한 보시를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 보시는 범위가 넓습니다. 봉사는 말하자면 몸으로 하는 보시가 되겠습니다. 내가 능력이 있다면 재능기부를 하는 것도 보시일 것이고요. 이제는 나이도 있고 몸으로 하기에는 힘에 부친다, 하지만 그동안 살림살이는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으니 돈으로 봉사하고싶다고 하면 재보시가 되는 겁니다.
한 가지 흔히 하는 오해는 재보시라고 해서 금액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중요한 것은 필요한 곳에 능력에맞게 재화를 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절에서 부처님을 조성한다고 할 때 큰 돈을 내는 것보다 ‘내가 부처님 조성에 일조했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할 것입니다. 재보시의 핵심은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는 데에 있습니다.
‘나는 몸으로 행하는 봉사를 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어떤 봉사가 있을까요?
- 최근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면서 봉사가 보편화되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처음 시작’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나도봉사를 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백 번 했다 하더라도 한 번 실제로 행동한 사람보다 못합니다.
봉사적 측면에서 증심사 같은 사찰이 가지는 역할이 있습니다. 봉사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한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이웃이나 학생들, 공무원 등 다양한 계층에 시기적절한 응원을 전하는 피자가게, 팥빙수 봉사, 어르신식당 같은 봉사도 있고요. 사찰 내부적으로는 후원 봉사팀, 재무단, 법당, 합창단 등 신행이면서 동시에 봉사인 활동들도 있습니다.
제일 손쉽게는 종무소에 ‘봉사하고 싶다’고 연락하면 담당하시는 분들을 소개해줄 것이고요. 불교아카데미를 수강하면 자연스럽게 동참 모집에 응할 수 있겠습니다. 또는 주변에 봉사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구경 겸 가볍게 따라가서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면 그게 봉사하는 겁니다.
실제로 우리 절이 지역사회와 발맞춰 실천하고 있는 봉사가 무척 적극적이고 활발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 지역 동구청에서도 이러한 증심사의 활동을 반기고 있고요.
- 봉사하는 메커니즘을 알 필요가 있는데요. 우리가 봉사하고자 하는 대상과 직접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자자체에서 복지 관련 업무와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분들과의 유대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지자체에서 봉사가 필요한대상자들을 찾고 모집하여 우리에게 ‘고립 위험에 빠져 있는 어르신들을 위해서 사찰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해달라’고 요청해오면사찰에서 인력, 비용,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식으로 협업하는 겁니다.
재가자가 할 수 있는 봉사와 출가자가 할 수 있는 봉사가 따로 있나요? 수행하는 것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남을 이롭게 한다’는 보시의 측면으로 볼 수 있나요?
-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습니다만, 스님들은 ‘법보시’라고 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퍼트리는 것도 하나의 보시라고 보고 포교활동을 합니다.
불교의 핵심은 무아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수행한다면 그 수행은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깨닫는다는 것은 무아를 깨닫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자체는 나를 버리는 것이고,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수행 자체가 보시행이고 보시행이 곧 수행입니다. 육바라밀의 처음이 보시바라밀이고 마지막이 지혜바라밀인 것도 이런 까닭에 있습니다.
각자가 스스로의 자리에서 봉사와 보시를 실천하는 연말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