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서구 심우마을
거친 검은 소 길들이니 하얀 소가 되네
광주 서구는 지형이 너른 들판과 같아 평평한 편이다. 그렇다고 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산보다 낮은 구릉에 가깝다. 서구에 있는 산은 대부분 이름에 백(白)자가 들어있어 특별하다. 백마산(白馬山), 백석산(白石山), 백일산(白一山)이 그러하다. 동양의 오행사상에서 백(白)은 서쪽을 의미한다.
우연이겠지만 백마산과 백석산은 광주의 주산 무등산의 서쪽에 자리해 있다. (광주 서구에 있는 백일산, 백일지구, 백일로 등의 지명은 일제 강점기 때 친일논란이 있는 김백일 장군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함) 불교에서 백(白)은 깨침, 부처를 의미한다. 부처님의 32길상 가운데 백호상(白毫相)은 세존의 두 눈썹 사이에 희고 빛나는 터럭이 있고, 여기서 나오는 광명이 무량세계에 비춘다고 한다.
1950년에 제정한 세계 불교기의 바탕은 파랑, 노랑, 빨강, 하양, 주황 등 다섯 가지 색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하얀색은 깨끗한 마음으로 온갖 번뇌를 밝히는 청정을 상징한다. 선(禪)의 수행단계를 10단계로 나눈 십우도(十牛圖, 尋牛圖)에서 5번째 목우(牧牛)는 거친 소(마음)를 길들이는 장면이다. 여기서 검은 소는 길들이는 정도에 따라서 흰색으로 바뀌어 간다.
서구의 산 가운데 백석산은 금호동과 마륵동의 경계에 자리한 산이다. 해발 79.8m로 야트막한 구릉이지만 조계종 향림사와 염주사, 태고종 운천사, 천태종 금광사 등 주요종단의 사찰이 자리해 있다. 또한 산자락에 운천 저수지와 사당인 병천사 등 오랜 역사문화와 자연이 어우러져 있다.
백석산 자락의 사찰들 가운데 운천사는 태고종광주전남 종무원으로 마애여래좌상(광주시 유형문화재 제4호)이 자리해있다. 본래 정토사였으나 백석사로도 불렸고 해방 후 운천사로 바뀌었다.
운천사 마애불은 서구 8경의 하나로 높이 4m, 길이 5.6m 크기의 화강암을 동북면만 다듬어 양각으로 조성했다. 부처님은 앉은키 2.1미터, 총 높이 3.56미터에 이르는 마애불로 얼굴은 타원형으로 원만한데 눈은 선정에 든 듯 반쯤 뜨고 있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있고 코는 길고 오똑하며 목에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이 마애불은 떡 벌어진 어깨에 팔, 다리, 손발이 아주 커서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고려초기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서구 도심 속에 자리한 백석산 정상에는 금호정과 백석정 등 정자가 들어서 있다. 700m에 이르는 산책로는 서창, 풍암, 상무, 중앙공원, 대촌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2007년 백석산 벚꽃거리가 조성되었고, KBC에서 ‘좋은 이웃 밝은 동네’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살기 좋은 백석산 자락은 옛날부터 심우곡(尋牛谷)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본인들이 만든 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극락강 벽진나루에서 백석산 중턱의 고개 너머에 심우곡(尋牛谷)이란 동네가 표기되어있다. 이곳에서 북쪽길 따라 상무동 여의산 기슭 노치(老峙)마을로 가고 동쪽으로 풍암동 노인고개에 이르는 길이 그려져 있다. 고려말 충신 정몽주와 5분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병천사(광주시유형문화재 제11호) 인근은 심곡(心谷)마을이 표기되어있다. 아쉽게도 급격한 도시화로 이 지역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면서 심우곡, 심곡마을은 이름까지 잊혀버렸다.
남도에서 가장 큰 고을인 나주에서 극락강 건너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정토고을(光州)로 가는 길목에서 운천사 마애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부처님 전에 참배하고 세속의 거친 마음을 길들이면 그곳이 바로 극락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