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어등산 무너미(水踰峴) 고개
절 물을 고개 넘어 논으로 보내
광주 어등산 동쪽 절골마을에서 하남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다. 남도 땅 끝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삼남대로로 예로부터 중요한 도로였다. 지금은 왕복 4차선 자동차 전용도로가 개설되어 자동차만 다니는
길이다. 어등산에 사는 야생동물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위해 만든 어등터널에서 하남산단 쪽으로 이어진 작은 길이 있다. 무너미 고개라 한다. 지도에는 ‘물넘어 고개’로 표기되어 있다. 다행히 어등터널 안에 보행로가 있어 무너미 고개까지 갈 수 있지만 고개 너머는 논과 밭으로 막혀 옛길을 찾기 어렵다.
무너미 고개는 수유현(水踰峴)이라 하며, 고개가 낮아 이쪽 물이 고개 저쪽으로 넘어간다 하여 ‘무너미’라 한다. ‘물이 넘친다’ ‘물도 넘어가는 쉬운 고개’란 뜻이다. 이런 의미의 무너미 고개는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다. 광주 어등산 무너미 고개에는 스님이 고개 너머로 물을 넘겼다는 설화가 전해온다.
어등산 절골마을에 차준백이란 선비가 살고 있었다. 차씨는 절골의 큰 절 스님과 친분이 두터웠다. 차씨에게는 고개 너머에 논이 있었으나 아쉽게도 물이 부족해 농사일이 힘들었다. 그러나 산등성이에 있는 절에는 물이 솟아 절골아래 운수동 골짜기로 흘렀다.
차씨는 절에서 솟는 물을 고개 너머 논으로 보내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느 날, 탁발나온 스님이 차씨 집에 들렀다가 간절한 부탁을 받았다. 절 앞에 흐르는 물을 고개 너머로 돌려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스님은 차씨에게 “물을 넘기기는 어렵지 않으나 마침 장삼이 한 벌 필요하니 승복을 지어달라”고 했다. 차씨는 “물만 넘겨주신다면 뭐든 은혜에 꼭 보답하겠다”고 말하고 부인에게 베를 짜도록 했다.
스님은 고개 너머로 물길을 내기 시작했고 두어 달쯤 되어 일이 끝났다. 마침 그때 승복도 마무리됐다. 스님이 고개 너머로 물을 넘기면서 “물 넘어가니 물 받으시오”라고 외치자 차씨도 고갯마루에서 “스님, 장삼 받으십시요” 하고 승복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 후 이 고개를 물이 넘어간다 하여 무너미 재, 또는 무네밋 재라 부르고 있다.
어등산 무너미 고개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삼남대로 길목이다.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이나 장사꾼들이 고개를 넘어가다 날이 어두워지면 절골 마을에서 하룻밤 숙식을 하고 새벽닭이 울면 무너미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갔다.
절골마을 아래 쉼등골에 주막이 있었는데 인적이 드물고 깊은 산중이어서 도적이 많았다. 초저녁에 산적들이 닭 우는 소리를 내면 장사꾼들이 날이 샌 것으로 알고 자다가 일어나 무너미 재를 오르다가 산적들에게 돈과 물건을 약탈당하기도 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절골마을 사람들이 농사지으러 무너미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