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오백명의 산적을 교화한 상낏짜 사미

2019년 5월 5일 초하루법회

부처님 당시에, 사리불 존자를 모시는 상낏짜라는 7살 난 어린 사미가 있었습니다. 한편 귀족 가문 출신의 30명의 사람들이 부처님께 귀의하고 출가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이 30인의 비구들을 사리불 존자에게 보냈지요. 그러나 사리불 존자께서는 이들을 직접 거두지 않고 상낏짜 사미가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니 데리고 가서 안거를 나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린 사미를 데리고 안거할 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마침 한 마을에서 수행할 처소를 제공하고 매일 공양물을 올리겠다고 청하니 그 곳에서 안거를 나기로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몹시 굶주린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30인의 비구 무리가 공양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그네는 궂은 일을 다 할 테니 자신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고, 비구들은 이 나그네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이내 비구들과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무리에서 빠져 나와 숲 속을 가다가 500명의 도적에게 붙잡혔습니다. 500명의 도적들은 나그네를 잡아 숲 속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기로 합니다. 나그네는 너무 놀라 산적 두목에게 말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저 같이 천한 사람을 신께 제사 올리면 신을 진노하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주 훌륭한 귀족 가문 출신의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귀한 스님들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면 그것이야 말로 신에게 아주 좋은 공양이 될 것입니다.”

500명의 도적들은 나그네를 앞세워 비구들의 처소로 갔습니다. 나그네가 종을 땅땅땅 치니 약속이라도 한 듯 스님들이 모였습니다. 비구 중에 제일 높은 비구가 도적두목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니 당신들 중 한 명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려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비구는 ‘내가 대표로 잡혀 가서 공양물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고 공양물이 되기를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높은 스님이 “아닙니다, 스님은 우리의 무리를 이끌어 가야 하니 제가 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 번째 스님이 나서서 ‘제가 가겠습니다’, 또 네 번째 스님이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쌍낏자 사미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왔습니다.

어린 쌍낏짜 사미가 “제가 가겠습니다.” 라고 하니, 비구들은, “사리불 존자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너를 부탁을 했는데 만약에 네가 죽임을 당하면 우리가 그 비난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너는 가지 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어린 사미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닙니다. 사리불 존자께서 저를 보낸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함이었으니 비구들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래야지만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됩니다.”

이렇게 어린 사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적 두목이 칼로 사미의 목을 쳐도, 목이 날아가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이 부서지는 것이었습니다. 도적 두목이 어린 사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칼을 들고 목을 치려 하면 사람들은 두려워서 공포에 떠는데 당신은 어째서 공포에 질려 울부짖지 않습니까?”

어린 사미가 답했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은 정신적 괴로움이 없고,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초월합니다. 존재하려는 욕망이 파괴되어 버리면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단지 천근의 짐을 내려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어린 사미의 대답에 도적 두목은 감화를 받아 출가를 결심합니다. 두목이 출가한다 하니 부하들도 두목을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사미는 500명의 도적을 데리고 다시 30명의 비구들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어린 사미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욕망에서 벗어난 사람은 정신적 괴로움이 없고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은 모든 두려움을 초월한다.”

역으로 말하면 욕망이 있으면 괴롭고, 집착하는 게 있으면 두렵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괴로움을 낳고 집착이 두려움을 낳는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자식이 내 말을 안 들으면 두렵습니까? 아니죠. 화가 납니다. 화가 나는 건 괴로운 겁니다. 이것은 욕망입니다. 반대로 자식이 혼자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합시다. 끼니는 거르지 않고 잘 먹고 지내는지, 총기사고라 나지 않을지 하루하루가 불안합니다. 이런 두려움은 집착 때문입니다. 욕망과 집착은 이렇게 다릅니다. 물론 근본으로 파고 들어가면 집착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욕망이 깊어지면 집착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면, 그것은 곧 내가 뭔가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게 없다면? 자식들도 다 잘 살고 남편 사업도 잘 되고 아무 문제가 없는데 불안한 마음이 있다면? 한 가지 딱 놓치고 있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집착하는 가장 큰 대상은 바로 자신입니다.

자식에게 집착하고 자식에게 혹시라도 좋지않은 일이 생길까 불안하고 두려운 것은 다름 아닌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자식이라면 불안해하고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남의 자식이라면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결국 자식에게 집착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자식은 나의 소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소유물에 애착은 곧 나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상낏짜 사미가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은 공포가 아니라 천근의 짐을 내려놓는 것에 불과한데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그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나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이 육신은 내가 아니다’ 라는 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내가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고 뼈저리게 느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이 상낏짜 사미처럼 없어야 됩니다. 죽음이 나에게 다가올 때, ‘이제야 이 무거운 육신의 짐을 벗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화한 것입니다.

내가 병이라도 걸리면 내 자식들은 어떻게 하나? 이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찬찬히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내 밖에 있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지금은 이렇게 잘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의 육신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나에 대한 집착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잘 볼 수 있어야 진정한 불자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겠다고 다짐하고 결심한다고 해서 집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릇된 욕망과 집착은 수행한 만큼 덜어집니다.

‘나는 스님이 아니니까 수행자가 아니다. 스님을 잘 모시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 모두는 수행자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내 안의 그릇된 욕망과 집착을 덜어 낼 수 있고, 올바른 수행자를 볼 줄 아는 지혜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매순간 수행자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길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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