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두 갈래 길, 보살의 길과 중생의 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전생담, 조리와 속리 형제

옛날 인도에 한 장자가 살았습니다. 모든 걸 갖춘 장자였지만 자식이 없어 열심히 기도한 끝에 마침내 3년 터울의 두 아들을 얻었습니다. 귀한 자식을 얻은 장자는 용하다는 사람에게 이 아이들의 앞날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둘 다 부모와 인연을 빨리 끊을 팔자라는 겁니다. 이에 장자는 첫째의 이름을 조리(早離), 둘째의 이름을 속리(速離)라고 지었습니다.

아이들의 팔자를 받아들이면서 이름에 일찍 떠나고[早離] 빨리 떠난다[速離]는 뜻을 담은 것입니다. 예언대로일까요. 아이들이 커가는 와중에 사랑하는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장자는 후처를 얻었고 후처는 다행히 아이들을 잘 돌보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나라 전체에 엄청난 기근이 닥쳤습니다. 장자는 돈을 벌어오기 위해 금은보화를 챙겨서 멀리 떠나게 되고, 후처는 남편이 떠난 후 둘이나 되는 전처 소생의 아이들을 건사하기 힘들어, 두 아이를 내다 버리기로 작정합니다. 무인도에 버려진 10살, 7살 먹은 아이들은 배고프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원망스러운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이 때 첫째 조리가 둘째 속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무인도에 버려져 배고픔과 온갖 고통을 겪고 보니, 이 세상에는 많은 괴로움이 있음을 알겠구나.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통의 체험을 인연 삼아서 우리처럼 의지할 바 없이 외롭고 고통스러운 사람을 구원해 줄 생각을 하자꾸나.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곧 우리가 위로받는 길이 아니겠느냐?”

그 말을 듣고 감동한 둘째는 발원문을 썼습니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세세생생 중생을 제도하는 데 온 생을 바치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이윽고 두 형제는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700억 부처님들의 어머니, 관세음보살

한편,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장자는 자식들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무인도에서 아이들을 찾았습니다. 장자는 소중한 아이들이 굶어 죽은 것을 발견하고 비통한 와중에 아이들이 남긴 발원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본인도 아이들처럼 세세생생토록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500개의 대원을 세워서 발원한 이 장자가 바로 훗날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시고, 첫째 조리는 관세음보살, 둘째 속리는 대세지보살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흔히 관세음보살을 불모(佛母)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첫째 조리의 영향으로 둘째는 발원문을 쓰고, 아버지인 장자 역시 이 발원문을 보고 500개의 대원을 세워 보살의 길로 들어섰기에 관세음보살을 부처님의 자애로운 어머니라고 칭한 것입니다.

<천수경>에 나오는 ‘나무칠구지불모대준제보살’이라는 명칭도 마찬가지입니다. 준제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니, 칠구지 불모 대준제보살이라는 것은 700억이나 되는 부처님들의 어머니이신 대준제보살이라는 뜻입니다.

헨젤과 그레텔

여기까지가 세 분 불보살님의 전생담입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스토리 같지 않습니까? 계모가 나오고 전처 소생이 나오고 아이들을 버리는 내용입니다. 널리 알려진 서양의 동화 ‘헨젤과 그레텔’과 스토리 구조가 같습니다. 헨젤과 그레텔도 이 전생담처럼 부모에게 버려집니다.

그러나 전생담과는 다르게 기지를 발휘하여 상황을 극복합니다. 처음 버려졌을 때는 조약돌로 길을 표시하여 집을 찾아가고, 두 번째 버려져 마녀의 집에서 고초를 겪지만 결국 마녀를 물리치고 귀환합니다.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는 현생에서의 확실한 물질적인 인과응보를 보여줍니다. 헨젤과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가자 아이들을 내쫓았던 계모는 병들어 죽고 아이들은 마녀의 집에 있던 금은보화를 챙겨와 잘 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니까 말입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조리와 속리는 우리의 고통을 인연 삼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서원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보살의 길입니다. 반면 헨젤과 그레텔은 자신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후, 자신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상황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보가 바로 그 자리에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중생의 길입니다.

80년 광주의 두 갈래 길

소설가 한강은 광주항쟁을 무대로 쓴 소설 <소년이 온다>로 국제적인 상을 받았습니다. 이 때 쓴 수상 소감문에서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왜 인간들이 인간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죽였는가? 집에 있었다면 안전했을 사람들은 왜 병원 앞에서 온종일 줄을 서서 자신의 피를 나누려고 했는가? 도청에 끝까지 남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어떻게 그토록 폭력적이며, 또한 그토록 존엄한가? 광주는 인간의 폭력과 존엄이 함께 하는 모든 시공간의 보편적인 이름이다.”

80년 광주에서도 두 갈래 길을 발견합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학살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그 속에서 서로를 돕고 자신의 피를 나누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살아있었습니다. 독일 유태인 출신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태인 전범 재판에 나온 학살자가 “그때는 전쟁 중이었다. 상부의 지시였고, 나는 지시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항변하는 것을 보고 ‘악의 평범성’을 말했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광폭하고 폭력적인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광주 항쟁을 이야기할 때도 누군가는 이야기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상부의 지시였다고.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두 갈래 길에 대한 나의 선택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결정과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인간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는가?

인간에게는 항상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보살의 길과 중생의 길.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불자라면 보살의 길과 중생의 길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보살의 길을 선택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내가 어떤 결정을 하고 있는지는 자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최소한 아귀와 같은 삶, 지옥같은 삶을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장의 욕심에 다른 사람을 짓밟고 극단적으로는 죽이기까지 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 삶을 자각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자의 길이 아님은 물론, 인간의 길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양심이란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불자의 양심은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서원을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불자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항상 깨어있는 마음과 참회하는 자세로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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