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무상과 간절함

2019. 5. 22. 지장재일 법회

일본인들의 결벽증

일본 여행을 가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지나치게 깨끗한 거리입니다. 한번은 교토의 거리를 걷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청소에 집착하는 게 어쩌면 자연재해가 잦은 환경과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일본 사람들은 무너지면 다시 재건하기를 천 년 넘게 반복해 왔습니다. 20세기 들어 엄청나게 큰 지진이었던 관동대지진 때에는 일본 사람들 조차 도교는 이제 복구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도 몇 년 만에 멀쩡하게 복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복구하고 재건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여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가꾸어도 지진 한 번 일어나면 끝난다는 것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일까요?

지진이 나면 아무리 잘 가꾸어 놓아도 파괴되어 버립니다. 지진이 끝난 다음에 원상복구를 한다고 해도 옛날 그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이 길, 이 거리, 이 건물은 지진이 한번 덮치면 두 번 다시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을 일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지금 이 순간의 이 거리, 이 건물은 오직 이 순간뿐이라는 생각때문에 일본인들이 결벽증으로 보일 정도로 주변 환경에 집착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보았습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지진, 쓰나미 그리고 태풍이 잦은 환경 속에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무상에 대한 자각이 다른 사회보다 더 강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일본인의 정서에 스며든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

무상함에 대한 간절함이 일본인의 정서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요? 말에서도 나타납니다. 우리나라 말이나 영어나 중국어에는 ‘영원히 안녕’에 해당되는 인사말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일본어에는 영원히 안 볼 때 해당하는 인사말이 따로 있습니다. ‘사요나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이제 이 사람하고는 다시는 못 본다 라는 상황이 규정되어 있는 겁니다. 한 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민족적인 인식이 있는 겁니다.

벚꽃은 일본의 국화입니다. 벚꽃은 봄바람이 살랑 불면 비가 내리듯 쏴아아 떨어집니다. 벚꽃은 피었을 때보다 떨어질 때가 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그 한 번으로 끝입니다. 피어 있는 것은 며칠 동안 볼 수 있지만, 떨어지는 것은 한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왜 벚꽃이 일본의 국화인지 짐작할 법합니다. 또한 1,600년 경 당시 일본에서는 오직 한 번만 공연하는 독특한 형식의 가부키(전통 연극)가 유행했습니다. 대본, 의상, 무대 등 모든 것이 오직 한 번의 공연을 위해서만 쓰일 뿐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형식의 연극은 없습니다.

이렇듯 일본인들의 정서 속에는 한 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즉 무상(無常)에 대한 자각이 자리잡고 있는 듯합니다.

문제는 아상(我相), 내가 있다는 생각이다.

무상에 대한 자각이라 함은 한 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렇기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 더 집착하게 됩니다. 왜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는 것일까요? 바로 아상(我相)이라는 놈 때문입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있고, 또 내 것이 있고,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넓은 의미의 나입니다. 그런 내가 사라지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은 나는 소중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나는 소중하기 때문에 내가 사라지는 일은 생겨서는 안되는 겁니다.

이런 생각들이 굳어지면 자연스럽게 나와 내 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무상함을 경험하게 되면 더더욱 이런 집착이 커지고 굳어지는 것입니다. 집착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내 자신을 확장하는 겁니다. 자식이 의대를 가면 행복해질 거라는 내 생각을 확장하여 아이가 내 생각대로 하기를 바라는 겁니다. 많은 부모들이 집착이라고 쓰고 읽을 때는 사랑이라고 읽습니다. 사실은 사랑이 아니고 집착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이 하나 되는 것, 한 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런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중생은 집착이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는다.

불교에서는 사랑이라는 애매한 표현보다는 자비라는 말을 씁니다. 사랑 자(慈)에 슬플 비(悲). 대중가요에 나오는 슬픈 사랑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슬프다는 말은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는 겁니다. 상대방이 슬프면 나도 슬프고 상대방이 기쁘면 나도 기쁘다는 의미입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내 자신이 없어야 됩니다. 상대방이 좋아하면 나도 좋은 거고 상대방이 싫어하면 나도 싫은 겁니다. 내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자비의 출발점이자 자비의 목적지입니다. 이것은 집착과 정반대인데 우리는 집착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내 자신이 사라져야 됩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쪽으로 가면 안 돼” 라고 혼내고 따지고 비판합니다. 이것은 내 생각을 강요한 겁니다. 집착이지요.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이 부처님 생각과 다르게 행동하면 어떻게 했습니까? 경전을 보면 제자들간의 다툼을 부처님께 말렸던 일화가 나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을 충고했습니다. 그래도 다툼이 끊이질 않자, 무리를 떠나 혼자 숲 속으로 들어가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코끼리와 코브라가 부처님을 시봉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부처님을 찾아가 참회했다고 합니다. 부처님은 충고하되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도록 배려하되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다툼에 빠진 제자들을 바라보는 부처님은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을 혼내고 따지고 벌을 주는 것은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고, 아상을 더 키우는 것이고, 집착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나를 지우는 것이다.

이렇듯 집착과 사랑은 뿌리가 다르다는 점을 꼭 명심해야겠습니다. 나를 키우고, 나를 확대하는 것이 집착이라면, 사랑은 나를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하나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동체대비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동체(同體), 한 몸이라고 생각하니까 대비(大悲), 큰 자비심이 나오는 겁니다. 저 사람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교정해야 하는 대상이어서가 아니라, 한 몸이니까 말입니다.

같은 무상을 느끼더라도 내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헛되이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게 됩니다. 집착하게 되면 집착하는 만큼 지금 내게 있는 것들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아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체대비의 마음에서 보자면 생겼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 생기는 끊임없는 변화는 다만 일련의 과정일 뿐입니다. 개별적인 존재들이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상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세상만물은 제각각 흩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몸(同體)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비심이 나오는 것입니다. 무상을 자각하는 것이 지혜이며 곧 자비심을 키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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