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법문

복은 비는 것인가? 복은 짓는 것인가? – 미얀마 성지순례 이야기, 첫 번째

2019. 11. 29. 초사흘법회

미얀마에서 본 불상들은 우리나라하고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부처님들은 몇 십 년 지나면 낡아서 금이 떨어져 초라해집니다. 그럴 때 개금불사를 해서 새 옷을 입혀 드리면 깨끗해집니다. 그런데 미얀마 부처님들은 알아서 스스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미얀마 불자들에게는 불상에 금박 공양을 올리는 풍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멀리 있는 부처님이면 몰라도 손이 닿을 수 있는 위치의 부처님이면 닿는 곳마다 금박이 붙어있습니다.

미얀마에는 3대 성지가 있습니다. 양곤의 쉐다곤 파고다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다음은 만달레이의 마하무니 사원입니다. 마하무니 사원의 부처님은 일반적인 남방불교의 여성스러운 불상과는 달리 좀 불경스럽지만 강호동과 체격이 비슷합니다. 하도 사람들이 금박을 붙여서 덩치가 커진 겁니다. 세 번째 인레호수에 있는 파웅도우 사원에 가면 오뚝이를 닮은 다섯 부처님이 계십니다. 이 부처님들은 원래 5센티 정도였는데 몇 백 년 이상 사람들이 금박을 붙이다 보니 지금은 키가 30센티쯤 된다고 합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금박이 붙어서 오뚝이 같은 형상이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들이 기복적으로, 복을 빌기 위해 금박을 붙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절을 하다가 가끔씩 부처님과 눈도 마주치고 나름대로 소원하는 바를 읊조리기도 합니다. 그 모습이 기복 신앙이라고 하기에는 참 무덤덤합니다. 이 사람들이 믿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우리와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믿음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믿음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식당에 가서 짬뽕을 달라고 했을 때 짬뽕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송정역에서 용산역 가는 기차를 타면 서울에 도착한다는 믿음 같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 사이의 믿음입니다. 자식이 자라면 학교도 가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믿음 말입니다.

세 번째는 종교적인 믿음입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하나님은 믿어야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믿음,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입니다. 불교적인 믿음은 귀의하는 것입니다. 귀의한다는 것은 불법승 삼보로 돌아가서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은 피난처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생사의 괴로움이라는 거대한 홍수로부터 우리가 피난할 수 있는 의지처가 불법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부처님이 살아계신다면 부처님의 옷자락 뒤에 숨으면 될 텐데, 부처님은 2,50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부처님께 어떻게 귀의합니까? 그러므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의 삶을 알고 부처님이 사신 대로 나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법에 귀의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승에 귀의하는 것은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니 등 사부대중의 무리인 승가에 의지한다는 말입니다. 나 혼자 수행하는 것이 힘드니까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수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승가에 의지한다는 말은 승가가 표방하는 계율을 지키고 수행자들 무리 속에서 화합하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삼귀의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한다는 것입니다.

복은 비는 것입니까? 짓는 것입니까? 한 아이가 부모와 마트에 갔습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쓰는데, 이것은 복을 비는 것입니다. 저것을 내게 달라고 애걸복걸 손이 발이 되도록 비는 것입니다. 반면 복을 짓는다는 것은 이렇습니다. 마트에 갔는데 새로 나온 무선 청소기가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나는 사달라고 떼를 부릴 부모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저금을 합니다. 그렇게 돈이 모이면 그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을 짓는 것입니다.

복을 비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든 초자연적인 절대자이든 누군가 나에게 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짓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능성을, 힘을 내 안에 쌓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복을 짓는다는 말과 함께 공덕을 짓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따지고 보면 둘은 같은 것이지만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조금 다릅니다. 공덕은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내 안에 뭔가를 할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성이 되고 힘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쌓은 것을 밖으로 드러내면 덕행이라고 합니다. 덕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에 공덕이 쌓여 있어야 합니다. 옛말에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도 복 많은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복이 많은 사람은 이미 자기 안에 힘이 쌓여있고 그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면 되는 것입니다. 공덕을 쌓는 것은 불법승으로 돌아가 귀의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에 빨리 도달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 힘을 길러야 합니다. 결국은 불법승에 귀의하는 것이 공덕을 쌓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것은 참회하는 일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아가면서 지은 죄, 즉 탐진치로 인해서 한 행동이 다름 아닌 죄입니다. 생사의 바다에서 중생으로서 아무 생각 없이 범하는 이런 행동을 반성하는 것이 참회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곧 삼귀의이며, 이것은 공덕을 쌓는 것이며, 참회하는 것이며,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잘 하려면 방향이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공덕을 많이 쌓아서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힘을 쌓아놓아도 이것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 줄 모르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티벳불교에 “덕행은 말과 같고 서원은 말고삐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고삐란 말을 달리게도 하고 서게도 하고 방향을 지시합니다. 자동차로 치면 브레이크와 핸들을 말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공덕을 쌓아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복덕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서원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의 모든 의식은 네 가지 큰 서원을 세우는 사홍서원으로 끝납니다. 서원을 세우는 것은 어디로 가겠다고 하는 방향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무리 복을 짓고 수행을 짓고 공덕을 쌓고 참회를 해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미얀마 불자들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서원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미얀마 불자들이 금박 공양을 올리는 것은 공덕을 쌓기 위함인데, 그 공덕은 나 자신이나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중생이 다 성불하기를 바라는 서원을 향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도덕이고 윤리고 문화이고 일상생활인 미얀마. 때문에 그곳 불자들의 모습이 이방인이 보기에는 뭔가 무심하고 무던하게 보인 것입니다. 우리 같이 내 욕심에 애가 닳아서 안달복달 기도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보인 것입니다.

간절한 신앙도 물론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 특히 오계를 일상에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미얀마 불자들과 나의 어떤 점이 통하고 어떤 점이 다른가를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면서
신행생활의 방향을 점검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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