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 보왕삼매론 6

중생들은 어떤 장애를 만나면 그 장애를 피하려고 하나, 그 장애를 피하려고 하면 내 마음에 장애가 생긴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라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자, 인연법에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다. 장애의 공한 이치를 깨달아 장애가 장애 아닌 줄 알면 마음의 장애가 사라진다는 것이 보왕삼매론을 관통하는 공식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왕삼매론의 마지막 세 가지 경구를 살펴보자.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 때 과보 없음을 피하려고 하면 반드시 내 안에 명예심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과보 없음이란 무엇일까? 무주상보시이다. 자연이 무언가를 바라고 작동하는 것이 아니듯, 베푸는 것도 자연적인 현상이다. 무주상보시가 자연이다. 인연법이 원래 그러한데 우리는 굳이 그것을 피해서 과보를 바란다.
장애를 피하는 데에서 마음의 장애가 생기는데 그 장애란 바로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다. 명예를 얻는 것을 왜 장애라고 할까? 주변에서 나를 존경하고 흠모하고 깍듯이 대하면 당장은 기분이 좋지만 장기적으로는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왜나하면 영원히 그들로부터 똑같은 수준의 존경을 받는다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주변에서 나를 존경하는 모습이 달라지거나 조금이라도 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마음에 고통이 생겨난다.
덕을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다음 구절을 보자. 남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줄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덕(德)을 베푸는 것도 마찬가지다. 덕을 베풀려면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유를 들어 내 뒤주에 쌀이 별로 없는데 남에게 주려고 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해도 속으로는 벌벌 떨릴 것이다. 그런데 내 뒤주에 쌀이 가득 차 있다면 한 바가지 퍼주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다.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실은 내가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권력, 명예, 사랑, 정 같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도 무주상보시의 범주에 들어가는데, 실천하기에는 무척 어려운 것들이다. 예를 들어 사랑만큼 주는 동시에 바라는 마음이 큰 것이 없다. 부모자식 간에도 그렇고 남여 간의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랑이라 포장하지만 실은 명예욕이자 인정욕이다. 구속이자 지배욕이다.
인연법에 따르면 베푸는 것은 그냥 주는 것이다. 바라는 바 없이 그냥 주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라는 것을 알고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보면, 우리가 평소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얼마나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리라” 하셨느니라.
중생 앞에는 무주상보시라는 장애가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무주상보시를 피해 무언가를 과하게 바라는 것이다.
이때 마음속에 어리석은 마음이 요동치는 장애가 발생한다. 어리석은 마음은 무명(無明)이다. 어리석은 마음은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근본이다. 무언가를 탐내는 마음, 화내고 분노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어리석은 마음 역시 깊어진다.
모든 문제들의 출발점은 공덕에 있다. 내가 공덕을 많이 쌓아놓았다면 주면서도 바라는 게 별로 없다. 바라는 게 없으니 탐진치 삼독도 깊어지지 않는다.
선업으로 쌓은 결과물을 가지고 보시하면 그 보시가 공덕으로 돌아온다. 부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부정하게 살면서 누군가를 상처내고 죽이고 괴롭혀 보시한다면 그 보시는 눈물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며 올바른 보시로써의 가치가 없다’고 하셨다.
이 이야기의 출발은 선업을 쌓는 데에 있다. 부처님께서는 선업을 쌓는 방도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즉 팔정도를 제시했다. 불교에서 청정함은 신구의 삼업의 청정함을 말한다. 악업으로 인해서 생기는 번뇌를 멀리 떠난 것은 다시 말해서 몸과 말과 생각으로 선업을 짓는 것이다. 선업을 지으면 공덕을 쌓을 수 있고 공덕을 쌓으면 베풀 때에 과보를 바라는 삼독심이 생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번뇌에서 멀어져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 이것을 청정한 삶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억울하다는 것은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정신적으로 명예가 실추된 상황을 말한다. 내가 가진 기대 수준에 주변 상황이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억울하다. 예를 들어 나의 애정, 관심, 사랑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면 억울한 심정이 되고, 억울함을 밝히려고 하면 원한이 자라난다. 억울함은 받아들이는 것이며, 참고 용서하라는 이야기를 보왕삼매론의 마지막 구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통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이것이 장애다 생각하면 내 마음의 장애는 더 커질 것이고, 오히려 장애 가운데서 인연법과 연기실상의 세계, 즉 공(空)함을 알면 그 속에서 보리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 보왕삼매론의 공식이다. 묘협스님은 장애가 다가오면 오히려 반기고, 이것을 법왕의 큰 보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라고 당부하면서 보왕삼매론을 끝맺는다.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며, 가까이에 두고 수시로 들춰보는 일이다. 이 같은 내용을 불자로서 올바른 삶을 사는 지침으로 삼고 마음에 새기려 노력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