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8] 참선곡 1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 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긱반(着衣喫飯) 대인접화(大人接話)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是)에
소소영영(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本空)하고
천진면목(天眞面目)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할 제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한 이내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 마를 때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세
일념만년(一念萬年) 되게 하여
폐침망찬(廢寢忘饌)할 지경에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 영광(靈光) 개천개지(盖天盖地) 이러하고
열반진락(涅槃眞樂) 가이 없다
지옥 천당 본공(本空)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할 때 ‘나’를 볼 수가 없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은 나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냐는 경허스님의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몸뚱이가 나일까? 그런데 죽은 몸뚱이도 말을 하고 웃고 울고 보고 듣고 옷 입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몸뚱이가 나라는 대답은 틀린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나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생각하는 것을 보여 달라고 경허스님은 말한다. 마음이 따로 있고 번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찰나찰나에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두고 어떨 때는 망상이라고 하고, 어떤 때는 번뇌라고, 또 마음이라고, 의식이라고, 무의식이라고 말한다.
망상번뇌는 원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한 것이다. 한 찰나 생겼다가 사라지는 생각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안다면 공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생각이란 것은 그냥 생겼다가 그냥 사라진다. 그것이 생각의 속성이다. 즉 실체가 없는 것, 공한 것이다.
한편 마음은 무엇을 하는가?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빡할 때 천리만리를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이 분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눈이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음이 본다. 눈이 본다면 시체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눈이 본다면, 눈알을 내 밖으로 따로 빼놓으면 눈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마음이 없으면 눈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 내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형태가 없기에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의심을 해야 한다.
의심을 하되 어떻게 할까?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한다. 고양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집중하여 쥐만 쳐다보고 있다가 어느 순간 확 덮쳐서 쥐를 잡는다. 목 마를 때는 오로지 물이 어디에 있는지만 생각하고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다. 칠십 먹은 과부가 하나뿐인 자식을 잃었다고 할 때는 밥 생각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죽은 자식 생각뿐일 것이다. 그렇게 오로지, 간절하게 의심하라는 말이다.
의심은 추리와 다르다. 추리하는 것은 사실에 기반하여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의심하는 것은 어떤 이유도, 다른 생각도 없이 오로지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염불을 하다 보면 마음속 한편으로는 무엇이 이 소리를 내는 것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소리를 내면 내가 낸 소리가 내 귀로 들려온다. 그렇다면 이 소리를 듣는 놈은 무엇인지를 의심한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이지 하는 느낌을 계속해서 가져가는 것이다.
이렇게 의심을 깊이 탐구하게 되면 한 생각이 만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망상이 없는 생각과 생각 사이가 길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잠자는 것도 밥 먹는 것도 잊는 지경이 되면 대오하기에 가까워진다.
내가 부처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부처는 어떤 모습이나 천진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진하다는 것은 집착이 없다는 말이다. 아이들은 귀중하고 천하다는 것의 구별이 없다. 오만 원 짜리 지폐와 천 원 짜리 지폐에 대한 판단이 없다.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면 이와 같은 천진무구한 면모를 띠게 된다. 이렇게 깨달으면 내가 바로 아미타불이며 내가 바로 석가모니불이다.
내 안의 부처는 전혀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본래 있던 부처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개천개지한다는 것은 곧 너와 나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곧 온 세계이고 온 세계가 나이다. 열반의 진정한 즐거움이 끝이 없다.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지옥과 천당이 본래 공하고 나고 죽는 것 역시 본래 없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