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절따라특집

백제불교 일본불교 그리고 우리불교 (1)

'길따라절따라' 교토 불교문화답사기

‘코로나19 이후 처음 떠나는 여행’ 이라는 말만으로도 여행길에 나서는 설렘을 설명하기에 충분할 것 같다. 증심사는 길따라절따라 첫 해외 답사지로 일본 교토를 선택했다. 답사단 30명은 여행에 앞서 코로나19 3차 접종 증명서를 제출했고, 3월 8일 오전 9시 무안 국제공항을 통해 일본 오사카간사이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오사카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일본의 고도 나라로 향했다. 나라는 고대 일본에서 최초로 ‘법’을 제정하고 ‘국가’의 모습을 갖춘 곳이다. 일본이 원시국가에서 고대국가로 거듭난 중심에는 쇼토쿠 태자(성덕태자)가 있다.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쇼토쿠 태자는 552년 백제를 통해 들어온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일본 속 백제를 만나다’를 주제로 한 이번 답사의 첫 번째 목적지는 쇼토쿠 태자가 건립한 법륭사(호류지, 607년 건립 추정)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찰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백제관음상(구다라관음)’으로 더욱 유명한 절이다.

절1. 나라 법륭사(호류지)

일행은 한갓진 도로 사이로 조성된 울창한 소나무숲길을 따라 호류지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5중목탑의 상륜부다. 당대에 만든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라 한다. 헌데 모양새가 제법 익숙하다. 남원 실상사 동서 삼층석탑을 참배한 이에게서는 ‘어라!’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이 건립했다는, 백제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빼닮은 탑이다.

오중탑의 가장 아래층은 일반인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는데, 동서남북 네 면에 안치되어 있는 각기 다른 소조상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동쪽면은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대화, 서쪽면은 부처님의 사리를 나누는 장면, 남쪽면은 미륵하생, 북쪽면은 열반상이라는 사전정보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각 조각상의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다.

‘호류사 금당벽화’라고 하면 누구든 국사책 속 바랜 그림 한 장을 떠올릴 것이다. 고구려 출신 담징스님이 그렸다고 알려진 벽화가 법당 왼쪽 구석, 철망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다. 현재는 담징스님 본인이 직접 그렸다는 설보다 담징의 제자가 혹은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한다.

금당에서 담징벽화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이 법당의 주불인 청동석가삼존상이다. 623년에 완성되었다는 이 불상은 백제풍의 불상을 답습하던 기존 도래양식을 벗어나 도리양식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도리양식은 도래양식에 비해 불상의 얼굴이 직사각형으로 길쭉한 것이 특징으로, 같은 절에 모시고 있는 우리의 백제관음상의 얼굴과는 확연히 다르다.

청동석가삼존상을 둘러싼 네 귀퉁이에는 사대천왕이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량으로 진입하는 초입에 사천왕문을 세우는 우리나라와 달리 일본의 사찰에서는 법당의 주불 곁에 사천왕이나 금강역사 등을 배치하는 특징을 보였다. 도량을 수호한다기보다는 주불의 보디가드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 역사에 비해 보존상태가 극히 양호해 “이게 진짜 1000년도 넘은 불상이라고?”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백제관음상을 모신 대보장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대보장원은 큰 보물창고란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성보박물관이다. 백제관음상을 비롯해 하쿠호시대 유메치가이 관음상, 아스카 시대 옥충주자 감실, 백단으로 만든 구면관음상,  등 다양한 불상과 불교회화를 소장하고 있다. 관람루트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 마침내 백제관음상이 있는 메인 홀에 접어든다.

대보장원 안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호류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찰에서 전각 안을 촬영하는 것이 제한되는데,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직원들이 매의 눈으로 관광객들의 동태를 살핀다. 특히나 유명한 성보를 모신 곳에서는 극성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부처님께 다소 불경스러운 표현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호리낭창하다’는 표현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키가 크고 날씬하여 맵시가 있다는 말뜻 그대로다.  2.8미터에 달하는 큰 키, 측면에서 드러나는 날씬한 맵시, 그윽한 얼굴, 왼손에 든 정병, 정병의 주둥이를 살짝 집고 있는 손가락의 곡선, 그 섬세함. 어깨로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길쭉한 몸을 따라 늘어진 의상은 또 어떠한가. 그보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은 모습의 백제 부처님을 뵌 적이 있던가?

백제관음의 원래 이름은 허공장보살이다. 7세기 아스카시대의 걸작으로 알려졌지만 누가 어디에서 만들어 어디에 안치했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그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인도에서 만들어져 백제를 통해 건너왔다고 하는 설, 백제에서 제작되었다는 설, 백제의 양식과 기술을 따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설 등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1911년 호류지 창고에서 발견된 이 이례적인 부처님을 일본 학자들은 ‘조선양식’으로 만들어졌다고 판단했으며, 백제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 백제관음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민병찬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중요한 것은 백제관음이란 명칭을 일본에서 부였다는 것”이라며 “일본에선 예부터 좋고 아름다운 건 ‘구다라(백제)’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호류지에서는 백지 성왕의 모습을 본따 제작했다는 구세관음상이 있다. 몽전(유메도노)이라는 불당이다. 불상의 의복 양식이나 형태로 볼 때 백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고 한다. 아쉽게 우리 일행은 몽전을 뒤로하고 호류지를 나섰다. 또 다른 옛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절2. 나라 흥복사 (고후쿠지, 710년 건립)

발걸음을 재촉하여 당도한 곳은 고후쿠지 국보관이다. 흥복사 성보박물관인 이곳은 오후 5시까지만 출입할 수 있기에 최소 4시 30분까지는 입장을 해야만 하는 상황. 국보관의 불상들은 본래 가람 안 법당에 모시고 있던 것을 이관한 것으로, 각 전각을 밖에서 둘러보는 것보다 원래 부처님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국보관 관람이 더 내실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아스카시대의 국보로 ‘하쿠호의 귀공자’라는 별칭이 붙은 약사여래상 불두다. 685년 산전사(아스카야마다데라)의 본존상으로 모셔졌는데, 1187년 흥복사 동금당을 재건하면서 본존상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그리고 250여 년 후 , 흥복사 동금당 화재로 대들보가 떨어지면서 불상이 녹아내리고, 현재의 불두 부분만 남았다. 불두를 측면에서 보면 화마에 녹아내린 흔적이 선명하다.

 건칠기법으로 만든 다양한 불상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입장 티켓의 주인공인 아수라입상은 나라시대(734년)에 만들어진 수작이다. 아수라입상은 특히나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불상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하는데, 과연 다른 어느 절에서 만난 아수라상보다 매끈한 자태에 살아있는 듯한 표정, 그리고 다소 어려 보이는 얼굴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수라상을 비롯한 건칠팔부중상이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용을 두른 사갈라, 코끼리모양 투구를 쓴 오부정, 사자모양 투구를 쓴 건달바, 제3의 눈이 있는 긴나라, 야차 구반다, 새의 얼굴을 한 가루라, 필바가라 등이다.

건칠 십대제자상도 마찬가지로 나라시대 국보이다. 화재나 훼손 등으로 소실되지 않은 6구의 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수보리, 라훌라, 사리불, 목건련, 가전연, 부루나 존자 등이다. 화려한 갑옷에 부리부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대천왕 역시 국보.

폐관시간인 오후 5시가 가까워지며 일행들의 발걸음도 바빠진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부처님들이 계신 탓이다. 가마쿠라시대 국보인 금강역사입상은 2구가 한 쌍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아형과 입을 다물고 있는 옴형으로 표현된다. 서금당의 본존이었고 중요문화재인 석가여래 불두, 서금당의 협시불이었던 목조 약상보살 입상,  가마쿠라시대 국보인 문수보살좌상과 유마거사상 등 유구한 역사의 불상들이 도열하고 있다.

국보관에서 가장 크기가 큰 목조천수관음입상은 헤이안시대 국보다. 국보관 안에서는 가장 압도적인 크기라 일행 모두 이 부처님 앞에서는 합장을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밖에도 시대별 불교회화와 고승들의 진영, 의례집, 만다라, 목판 등 고대 일본불교 문화재를 양껏 친견하는 장이었다.

기념품점에서 기억할만한 기념품을 고를 새도 없이 5시 정각에 맞추어 국보관은 폐관했다. 어느새 새는 팔각지붕 뒤로 뉘엿뉘엿 늘어지고 있고, 고후쿠지 오중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답사단은 답사 첫 자유시간을 맞이했다.

일본에서 두 번째 높은 탑이라는 고후쿠지 오중탑은 무로마치 시대에 재건된 것으로, 메이지시대 폐불훼석 당시에 뗄감으로 전락할 뻔한 위기를 넘긴 탑이다. 그것도 “중요한 문화재니 불지르지 마시오”가 아니라 “우리집에 불똥 튀니까 불지르지 마시오”라는 이유로 현재까지 남아있으니 세상은 요지경이다.

너른 정원을 두고 있는 현재의 대웅전은 중금당이다. 가장 최근인 2010년 해체한 후 창건 당시 양식으로 복원하는 불사를 시작해 20210년 입주식, 2014년 상량식을 거쳐 2018년 10월 현재의 중금당으로 완공했다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9번째라고.

아름다운 팔각원당으로 고즈넉한 정취를 뽐내는 북원당은 721년에 지어진 후 1180년 겐페이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1210년경 재건된 것이다. 고후쿠지 전각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팔각원당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법당이 있었는데, 답사단은 신을 벗고 들어가 부처님을 참배하고 절을 올렸다. 이 전각 안에는 불상 대신 ‘거울’이 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부처라는, 우리 모두가 부처라는 의미였을까.

일반 관광객들에게 고후쿠지는 사찰이라기보다 사슴공원으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 경내 곳곳에 동글동글한 사슴똥이 흩뿌려져 있었다. 사슴공원과 연결되는 횡단보도에 사슴들이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사슴을 좇아 길을 건너면 국립나라박물관이 나온다. 좀처럼 보이지 않던 외국인(서양인) 관광객들이 박물관 앞 잔디밭에 삼삼오오 모여 사슴들과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집합하기로 한 시간에 맞춰 집결지로 향했다. 아뿔싸, 주차장이 폐쇄되어 버스가 도로가로 자리를 옮겼다. 잰걸음으로 버스에 탑승하는 것으로 첫날의 공식 일정이 마무리됐다.

절3. 나라 동대사(도다이지)

나라에 갔는데 동대사를 보지 않았다면 그건 나라를 간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일반적인 여행 루트를 따른다면 첫날 나라에 간 김에 법륭사와 흥복사, 그리고 동대사까지 참배하고 와야 했을 테지만 답사단은 흥복사에서 지근거리에 있는 동대사를 두고 발길을 돌렸다. 일본을 대표하는 명찰이자 고찰인 동대사를 시간에 쫓겨 대충 둘러보고 올 수 없다는 스님의 판단이었다. 하여 여행 셋째 날 교토에서 나라로 다시 들어가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기로 했다.

화엄종 대본산 도다이지는 고대 한국계 도래인들의 기술과 불교를 통해 나라를 수호하고자 했던 쇼무천황의 지원으로 건립된 절이다. 창건 당시 주지였던 백제인 양변스님은 신라의 심상스님을 모시고 강원을 개설했다. 신라 의상대사로부터 펼쳐져 나온 화엄사상이 심상스님을 통해 일본의 학승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심상스님이 학승들에게 <화엄경>을 강론하던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삼월당(법화당)이다.

관광객들에게 삼월당은 불꽃놀이로 유명한 이월당 곁에 자리한 작은 법당일 뿐,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불교순례를 온 우리 답사단에게 화엄사상의 법석이었던 삼월당의 의미가 작을 리 만무하다. 개별 입장권을 끊어 삼월당에 입장했다. 전각 안은 어둡고 고요한 가운데 몇 분의 불보살님이 나란히 나란히 서있었다. 본존은 건칠 불공견삭관음상이며, 그 주위로 730년 전후로 조성된 범천, 제석천, 인왕, 사천왕 등이 안치되어 있다. 일광/월광보살상의 단정한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불상을 마주보고는 단을 높인 다다미가 있어 걸터앉거나 아예 올라가 다리를 펼 수도 있었다. 일행 몇은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마 마음으로 부처님과 감응하는 시간이라 여겨졌다.

삼월당 왼쪽, 공덕주를 기리는 비석이 도열한 계단을 몇 계단 오르면 이월당이다. 이월당 난간 밑으로 흰 종이들이 대롱대롱 엮여 있는데, 음력 2월에 수이회라는 법회를 지내며 종이를 태우는 불꽃놀이 행사를 해서 유명해졌다. 물론 이월당 건물 자체도 에도시대에 재건된 것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월당 난간에 서서 나라 시내를 내려다본다. 나지막하고 고요한 풍경 사이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 불어왔다.

도다이지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대불전일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목조건축물이라는 설명대로 그 위용이 어마어마하다. 두 번의 화재로 소실된 후 에도시대에 송나라 양식을 추가하여 재건한 것이 오늘날의 대불전이라 하는데, 단일 건물의 높이가 46.9미터에 이른다.

이 압도적으로 큰 법당은 기실 그 안에 안치된 대불의 크기에 맞춰 지어진 것이다. 일본 최대의 불상이자 화엄경 연화장세계의 중심불인 동조 노사나불좌불이다. 앉은 키가 14.7미터로 우리나라 신흥사 대불(18미터)가 조성되기 전에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부처님이었다고.

가장 큰 크기만큼 여러 고초를 겪었다. 화재와 훼손 등으로 대불은 여러 시대에 걸친 보수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연화대좌와 다리 부분은 나라시대 당대의 것이고, 등은 가마쿠라시대,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은 무로마치시대 말기, 머리는 에도시대의 장인들이 만들었다. 협시불로는 여의륜관음좌상과 허공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세 불보살님의 뒤로는 사천왕상이 전각을 수호하고 있는데, 그중 두 대왕은 머리밖에 남아있지 않다.

크고 으리으리한 불상들도 좋지만 눈높이에서 눈을 맞춰오는 것은 의외로 부처님이 앉은 연꽃대좌이다.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연화장세계의 전각들, 부처님들, 스님들의 모습이 동글동글 귀여운 생김새로 새겨져 있다.

대불전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도 허투루 할 수 없다.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는 청동 등도 나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국보이고, 중문과 좌우로 이어진 회랑도 중요문화재이다.

도다이지에서 기념촬영은 어디서 하면 좋을까? 이전과 달리 대불전 앞에서의 단체사진은 불가하다고 한다. 하여 우리 일행은 대불전으로 입장하기 전, 사슴들이 뛰놀고 있는 공터를 거슬러 우뚝 세워져 있는 남대문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높이 25미터의 거대한 남대문도 역시 국보다. 불상 장인으로 이름을 떨친 운케이의 역작이라고 하는 금강역사상이 남대문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일본의 절들에는 유독 금강역사상이 많다. 소조나 건칠, 목조 등 다양한 기법으로 만든 금강역사상들은 사실적인 근육 묘사와 과장된 표정으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그 존재감이 미미한 금강역사상이 사찰의 전면에 배치되어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뭘까. 나라의 근간이었던 무사들이 불법을 수호는 금강역사상에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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