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불교 지명이야기

북구 연제(蓮堤)

광주 북구 연제동(蓮堤洞) 지역은 ‘연꽃’이 많이 피는 방죽이 있었다하여 ‘연제(蓮堤)’ 또는 ‘연지(蓮池)메’라 불렀다. 연제 서편에 대통골이 있었고 연못 아래에는 못논골이 있었다. 동남쪽에는 개금산(165m)이 있었으며, 으뜸마을인 외촌(밭들메) 동북쪽에는 장구봉, 동남쪽에는 외치골이 있었다.

장구봉 아래에 연제마을이 있었다. 연제마을은 풍수적으로 ‘물 위에 떠있는 배’ 형국이었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는 ‘통시암’이라는 사찰이 있었다. 연제마을은 땅은 넓었으나 물이 부족해 대부분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물이 없어 빗물에 의지하는 천수답이었지만 먹거리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을에 우물이 없어 멀리 떨어진 통시암까지 가서 식수는 물론 빨래와 허드렛물을 길어 와야 했다. 마을사람들은 물을 찾아 마을 곳곳을 팠지만 허사였다.

어느 해 여름, 노스님 한 분이 탁발 차 마을에 왔다. 스님은 마을에서 가장 부자이자 구두쇠인 최씨 영감 문 앞에서 합장하고 염불을 했다. “부처님전에 공양하여 복덕을 지으시지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때 마침 집에 있던 구두쇠 최씨 영감이 물 한 바가지를 가지고 나오더니 스님에게 확 끼얹으면서 스님을 쫓아냈다.

그러나 스님은 화내지 않고 합장하고 돌아서면서 “날도 더운데 귀한 물을 시주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러자 구두쇠 영감은 ‘귀한 물’이라는 말을 듣자 ‘마을에 물이 귀한지 어떻게 알까?’라는 생각에 예사롭지 않은 스님이라 여겼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는 스님을 다시 불러 세웠다.

“스님, 마을에 물이 부족하니 우물을 하나 파주구려” 스님은 “그렇잖아도 오다보니 물이 나올만한 곳이 있더이다”라며 우물터를 잡아줬다. 구두쇠 영감은 마을사람들을 불러 스님이 가르쳐 준 땅을 팠다. 땅을 한참을 파 내려가니 정말 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땅을 더 파내자 물이 꽐꽐 쏟아져 나왔다. 마을사람들이 식수와 농사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자리는 풍수적으로 배 형국인 마을의 중심부로 배 밑바닥을 뚫는 격이었다. 물을 쓰면 쓸수록 배가 물에 잠기는 형세였다. 해가 갈수록 최씨 영감의 가세는 서서히 기울고, 우물물로 화전을 일구던 마을사람들의 삶은 더 나아졌다.

그 후 우물이 넘쳐 방죽이 됐고, 연꽃이 피었다. 연꽃이 피는 방죽이라 하여 연제라 불렀고, 화전을 일구던 마을은 연제마을이라 불렀던 것이다. 연제마을은 연제동이라는 행정동으로 이어졌으나 대규모 개발로 옛 마을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현재는 연제 초등학교, 연제 주공아파트를 비롯해 상가의 이름에서 연제마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연제동의 근원인 연제는 오늘의 양산호수공원이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하며 호수공원 서쪽이 연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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